- Hyeongseok Na
-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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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수
이 페이지들에서 우리는 제1원리(first principles)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이해를 확보하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 헤겔의 원리는 형이상학이 대범하게 실행될 때 종착점으로 기대할 수 있는 명제로 나타난다. 그 원리가 정당화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가 이미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 핵심에는 동일률(Principle of Identity)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률은 한 논리학자가 최근 이를 두고 ‘취향에 따라… 최고의 형이상학적 진리이거나, 혹은 지극히 진부한 명제’라고 기술한 바 있으며, 비트겐슈타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회의를 불러일으켜 왔다. 개별적으로 이러한 회의를 해소하려는 시도의 엄청난 부담 앞에서, 나는 플라톤이 분할선(Divided Line)의 최상위 수준에서 절대적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모든 반론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점을 새삼 떠올린다. 동일률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경험적 자료뿐만 아니라 논리적 자료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통찰을 발휘하는 이론이 필요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레게(Frege)가 동일률에 대해 가졌던 의구심은, 동일률을 논리적 개념으로 정립한 것이 바로 프레게 자신이라는 점에서, 특히 놀라움을 자아낸다. 더밋(Dummett)은 이에 대해 ‘동일성을 최초로 논리적 개념으로 만든 것은 프레게였다’고 말하며, 이를 ‘(x) x = x’라는 공식 속에 정립했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 공식이 프레게에 의해 단순히 ‘모든 대상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의미로 간주된다는 점이며, 프레게에게 있어 모든 것이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일성 개념이 적절히 적용되지 않는, 그리고 신조차 고유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이러한 비대상적 항목들이 우리의 사고 속에서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가는 형이상학에서 가장 난해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프레게는 그의 논문 「함수와 개념」(Function and Concept) 말미에서 이 항목들이 ‘사물의 본성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개념과 대상」(Concept and Object) 말미에서 언급하듯이, 이러한 항목들이 대상과 대조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 ‘은유’와 ‘암시’ 없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불포화된’(unsaturated) 또는 ‘불완전한’(incomplete) 항목들이 형이상학적 근본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조차 프레게가 결국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렇다면 동일률이 적용되지 않는 이러한 이탈적 항목들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들은 수학자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함수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첫 번째 접근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적어도 함수와 유사하며, 동일성과 ‘유사한’(analogous) 무언가에 적용된다. 전문 수학자였던 프레게는 논리의 존재론적 기반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학문적 전통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개념을 직관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학은 오랫동안 가장 순수하고 성공적인 이성적 탐구의 전형으로 여겨져 왔으며, 이에 따라 철학을 수학의 자원으로 풍부하게 만드는 전망은 플라톤 이래 철학자들에게 강한 유혹을 불러일으켜 왔다. 그러나 그러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개념이 등장한 것은 프레게에 이르러서였다. 우리 역시 제1원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수학의 자원을 활용할 기회를 얻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우리가 장기적으로 고려해야 할 논점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총체적 목표를 더욱 충실히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함수 개념은 프레게 논리학의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등장하며, 이는 보편 양화사와 존재 양화사가 도입되기 이전, 우리가 단순히 논리적 명제 p와 q를 다룰 때부터 그러하다. 5장에서 ‘p ∨ q’ 형식의 명제에 대한 진리조건을 논의한 바를 떠올려 보면, 우리는 함수 개념을 활용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p ∨ q 형태를 갖는 명제의 진리값은 p와 q 각각에 부여된 진리값의 함수이다’라고 말할 때, 이는 단순히 ‘p ∨ q’의 진리값이 p와 q가 개별적으로 갖는 진리값의 특정한 조합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의미일 뿐이며, 이러한 의존 관계는 진리표에 의해 가장 명확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기초적 수준의 소위 ‘진리함수적 논리’에서는 함수 개념이 단순한 형식적 수사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양화 논리’ 또는 ‘술어 논리’로 발전하면서, 이 개념은 형이상학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
프레게는 함수 개념이 본래 수학에서조차 완전히 규정된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함수 개념은 지난 두 세기 동안 점점 더 확대되면서 유연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연속 함수이며, 예를 들어 ‘나무 그림자의 길이는 나무의 높이의 함수이다’라고 말할 때, 나무의 높이가 미세하게 증가할 때마다 그림자의 길이도 미세하게 증가하는 식의 ‘공변’(concomitant variation)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기본적인 개념은 하나의 변수가 다른 변수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관계에 있다. 연속적 크기에 비해 이산적 크기도 함수의 개념을 허용하며, 자연수의 영역에서 ‘7은 6의 함수이다’라고 말할 때, 이는 다음수 함수(successor function) f(x) = x + 1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는 곧 ‘7이 실제로 함수이다’거나 ‘무언가의 함수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처럼 비공식적 표현이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더밋이 지적하듯이 함수 개념 자체는 그러한 표현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표준적인 함수로는 예를 들어 g(x) = 6x³ + 5x² - 98과 같은 것이 있으며, 이는 x = 3일 때 109를 출력하므로 g(3) = 109라는 결과를 얻는다. 또한 상수함수(constant function) h(x) = 12는 모든 수를 12로 대응시키는 함수이다. 형이상학자들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으로 대응시키는 항등함수(identity function)일 것이다.
만약 항등함수와 상수함수가 처음으로 함수 이론을 수학 외부로 확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면, 수학 자체 내에서는 디리클레의 소위 특성함수(characteristic function)가 프레게의 작업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함수는 실수의 영역에서 각 유리수를 1에 대응시키고, 각 무리수를 0에 대응시키지만, 그 대신 런던과 파리를 유리수와 무리수 각각의 함수값으로 설정해도 거의 동일한 역할을 할 것이다. 여기서 ‘거의’라고 표현한 이유는 1과 0이 각각 어떤 항목이 유리수의 특성을 가진다는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데 있어서 신화적인 적절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암시 때문이다. 더욱 적절하게는, ‘예’와 ‘아니오’를 각각 유리수와 무리수에 할당하고 싶겠지만, ‘예’와 ‘아니오’가 실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이미 디리클레의 단계에서 함수 이론은 기존의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모든 사물의 특성, 즉 수학적 특성뿐만 아니라 비수학적 특성 또한 함수로 표현될 수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 사물에 특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술어화(predication)의 본질로 인식되어 왔으며, 따라서 수학적 논리학자로서 프레게가 이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라는 사고는 특성 함수w(x)=1w(x)=1(만약 x가 현명하다면) 또는w(x)=0w(x)=0(만약 x가 현명하지 않다면)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1과 0을 현명함 함수의 값으로 사용하는 것은 프레게와 같은 고전적 순수성을 지닌 사유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나도 규정적인 성격을 띤다. 우리가 항상 추구하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라는 사고는 우리에게 진리를 제시하며, 모든 참인 사고는 우리에게 진리를 제시한다. 비록 우리가 그 사고가 참인 사고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 그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에도 말이다.
위 문장은 그 자체로 보면 다소 진부한 표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프레게의 가장 난해한 입장 중 일부를 표현하고 있다. 최소한 체계적인 이유만으로도, 소크라테스를 변항(argument)으로 취한 현명함 함수의 값은 결국 하나의 진리값으로 귀결된다. 즉, 우리는 이를 ‘진리(the truth)’, ‘참(the true)’, 혹은 단순히 ‘진리(truth)’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때그때 가장 적절하게 느껴지는 표현을 사용하면 된다. 철학자들 중 거의 누구도 ‘진리’라는 단일한 대상이 실재한다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우리는 논리학과 의미론에서 진리값을 언급할 때 이 개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그리고 ‘문장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의 진리값’이라는 표현이 문법적으로 보면 한정기술구로 해석되어야 하며, 모든 단칭 용어(singular term)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대상을 지시한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일상적으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한다’라고 말할 때뿐만 아니라, 형식화된 의미론적 용어를 사용할 때조차 우리는 사실상 진리에 관한 한 프레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모든 회의주의를 종식시키고, 이미 익숙한 개념인 ‘참임이라는 속성(property of being true)’을 활용하지 않는가? 이 속성은 특정 믿음과 문장이 지닌 것으로,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w(소크라테스)=참임이라는 속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프레게의 함수적 술어 이론이 추구하는 핵심 목표 자체가 속성 개념을 전면적으로 제거하는 데 있다는 점이 문제로 남는다. 우선, 전통적인 술어 이론에서 프레게는 기본 문장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대상을 포함하는 구조로 간주하며, 여기서 대상은 소크라테스 자신이고, 개념은 술어 ‘x는 지혜롭다’의 내용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개념을 프레게가 특성 함수와 동일시한다면, 이는 단순히 속성을 수학자의 방식으로 다룬 것에 불과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 함수의 본질을 결정짓는 것은 그것이 ‘동일성이 없으면 대상도 없다("No entity without identity")’는 콰인의 격언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치인 함수들이 동일성 혹은 상이성(diversity)의 문제를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행성’ 함수 p(x)=x+10−c (여기서 c=행성의 개수를 생각해보자. 이제 이 ‘행성 함수’는 다음수 함수와 동일한가? 두 함수는 모든 동일한 입력값에 대해 동일한 출력값을 갖기 때문에 확실히 동치, 즉 값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인어 함수’와 ‘켄타우로스 함수’를 생각해 보자. 이들은 모든 입력값을 동일한 진리값, 즉 ‘거짓임’으로 사상한다. 표준적인 견해에서는 ‘x는 인어이다’와 ‘x는 켄타우로스이다’라는 술어의 개념들이 서로 다르다고 보고, 이에 대응하는 속성들도 거의 항상 다르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해당 함수들이 제공하는 대응 관계를 보면, 이 함수들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불분명하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함수를 대응 관계(correlation schedule) 자체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지만, 프레게 시대에는 그러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동치인 함수들이 동일한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신조차도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논의에서 콰인의 격언이나 동일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함수는 본질적으로 수학적 학문에 특화된 임시적 개념이며, 그 (상대적인) 불확정성은 함수가 설계된 한정된 목적과 완전히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엄격한 동일성과 상이성의 기준을 오직 본격적인 존재론(ontology proper)의 요구 사항을 고려할 때만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프레게에게 이러한 온건한 절충적 접근은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응답했을 것이다.
“역시 철학자들이란! 플라톤 이후 철학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수학자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인식을 성취했다고 자부해 왔습니다. 하지만 부디 나를 탓하지 마시오. 나는 내 학문이 허용하는 제한된 이해에 만족하는 것으로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