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yeongseok Na
- 2월 21일
- 3분 분량
변증법적 장치(as such, qua, in itself, to us)
형이상학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존재론과 동일시한다면, 가장 순수한 형이상학적 교리는 프로타고라스의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어떤 것에 상대적인 것이다”라는 논제가 될 것이다. 이 논제를 한층 더 세밀하게 다듬는다면, 프로타고라스에 따르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란 곧 “상대적이다”를 의미하며, 이는 ‘그 자체로(as such)’라는 변증법적 표현을 활용한 논의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정의를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를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었지만, 프로타고라스의 주장도 역시 궁극적으로 존재로서의 존재(being qua being)에 관한 교의에 몰두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정의는 본질주의적 입장을 포함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대 입장인 상대주의나 반본질주의도 이 정의를 확장하여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장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프로타고라스뿐 아니라 콰인과 같은 반본질주의자(anti-essentialism)도 본질주의적 관점에서의 존재론적 정의에 포함되기 어렵다.
현대 철학자들은 형이상학, 혹은 존재론의 정의 문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는 논리실증주의와 비트겐슈타인의 전성기 동안 형이상학 자체에 대한 논의보다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이 진짜로 의미있는 학문인지를 묻는 방법론적 논의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형이상학의 인지적 지위(cognitive standing)에 관한 논의가 더 중대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이 무엇을 다루는 학문인지 형이상학의 방법론적 문제를 다뤘지만, 칸트에 이르러서는 이 문제가 훨씬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이상학적 활동에서 이성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한계가 있는지 검토하였다.
현대 철학자들은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논의가 이미 충분히 다뤄졌다고 생각하고, 형이상학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태도는 지나치다. 철학자는 “영원한” 문제들, 즉 변하지 않는 진리나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역사적 관점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어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감각이 철학자에게 부수적인 역할을 하더라도 ‘조기 경보 시스템’처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형이상학적 논의의 방법론만을 계속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이 철학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본질주의(essentialism)와 상대주의(relativism)라는 두 중요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겠다. 일단 상대주의와 반본질주의가 어떻게 존재론적 교리로 간주될 수 있는지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1장에서 본질주의는 존재하는 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이론으로 제시되었다. 2장에서는 반본질주의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확장된 형이상학적 정의를 통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 보여졌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사물의 고유한 속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테아이테토스』에서처럼 비관계적인 속성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확장된 형이상학적 정의가 반본질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지만, 상대주의에는 여전히 적합하지 않다.
반본질주의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확장된 존재론적 정의 속에 포함될 수 있다. 이 정의는 어떤 사물의 본질적 속성뿐 아니라 그것이 그 자체로(per se) 가지는 모든 비관계적 속성도 포괄한다. 반면, 상대주의는 그러한 정의로 포섭되기 어렵다. 상대주의자는 어떤 사물도 그 자체의(per se) 속성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는 강한 의미(본질)에서도, 약한 의미(비관계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입장을 통해 상대주의는 단순히 부정적인 관점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의 한 유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상대적이다”라는 주장 자체가 존재 자체에 관한 순수한 이론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정의 안에서 상대주의가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변증법적 장치(‘그 자체로(as such)’와 ‘~로서의(qua)’)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주요한 논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가령, “전쟁의 경제학(The Economics of War)”이라는 책이 “이는 전쟁 그 자체(as such)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경제적 현상으로서의 전쟁에 관한 연구다”라고 시작한다면, 이는 전쟁 그 자체(as war)에 관한 논의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두 표현 간의 논리적 동등성은 단순히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모든 대상에 대한 담론에 걸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는 존재 자체에 관한 교리로 간주될 수 있다.
변증법적 장치가 철학 외부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존재론 그 자체에 기여할 수 있음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상대주의는 마침내 존재 자체를 다루는 이론으로 인정받았으며,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존재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배정이 필요한 것은 본질주의와 반본질주의이다. 존재론은 존재로서의 존재(being qua being)뿐만 아니라 사물에 고유한(per se) 속성들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1차적 임무와 2차적 임무를 동시에 지닌다.
1차적 임무로, 존재론은 상대주의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는 고대 프로타고라스적 형태의 상대주의든 현대 칸트 이후의 형태든 상대주의의 참거짓 여부를 결정하는 작업이 포함된다. 상대주의가 거짓으로 밝혀질 때에만 존재론은 2차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사물들이 그 자체로(즉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본질주의와 반본질주의 간의 논쟁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만 2차적 임무로 특정 사물의 고유 속성이 단순히 비관계적 속성과 동일한지를 탐구할 수 있다. 현재의 설명에 따르면, 형이상학자는 주로 절대적인 것(the absolute)에 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교리를 다루고, 본질에 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교리는 부차적으로만 다룬다.
우선순위는 현저히 뒤바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자가 주로 본질에 대한 탐구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고, 비관계적 속성의 존재를 입증하는 작업은 부차적(그러나 예비적)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는 그 자체로 옳을 수 있지만, 상대주의와 본질주의라는 실질적 쟁점들에 있어 방법론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저자가 보기에는 현대의 관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보다 현재 논의되는 반전된 체계가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절대적 존재 여부를 먼저 탐구하고, 그 다음 본질을 논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쟁으로서의 전쟁(war as war)’이 우리의 한계에 따라 인지적 우선순위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존재로서의 존재(being as being)’가 논리적 우선순위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자가 후자의 특수 사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변증법적 장치에 대한 도구로 추가된 ‘우리에게(to us)’와 ‘그 자체로(in itself)’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 성격을 해명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그의 학문은 형이상학이나 심지어 존재론조차 아닌, ‘제1철학’으로, 근본적이고 1차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자는 사물의 궁극적 구성 요소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잘못된 관점이다. 더욱 근본적인 질문은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지, 또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지 여부이다. 여기에서 ‘그 자체로(in itself)’라는 개념이, 존재론적으로, 존재 자체로 드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