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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에 대한 논리적 접근] 진리

  • Hyeongseok Na
  • 2월 21일
  • 6분 분량

동일률과 형이상학의 기초

논리학이 형이상학을 엄밀한 학문으로 정립할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이전 논의가 그런 낙관적 전망에 현실적 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하나의 신뢰할 만한 원리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동일률(Principle of Identity)는 형이상학적 탐구에 있어 논리적 기초로 간주될 수 있는 중요한 원칙이다. 동일률은 모든 존재자가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기본 진리를 천명하며, 이는 논리적·형이상학적 논의의 출발점으로 작용한다.

 

동일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존재자도 자기 자신과 동일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 기호 논리에서는 간단히 (∃x)(x=x)로 표기한다. 이는 "무(無)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며, 자기 동일성을 존재 자체와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특징을 지닌다. 더욱이, 자기 동일성은 관계적 특징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를테면, 프로타고라스의 바람조차도 다른 것들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자기 동일성을 본질적으로 소유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속성은 단순히 우연적(accidental)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essential)인 속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자기 동일성은 특정 속성(F나 G)을 가진 한도에서만 아니라 그 존재자가 "그 자체로서" 갖는 속성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자기 동일성은 형이상학적 속성의 탁월함으로 여겨지며, 본질과 절대성에 동시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동일률을 형이상학적 속성의 전형적 사례로 간주할 때, 이는 본질과 절대성에 접근할 수 있는 논리적·존재론적 지위를 제공한다. 이 원칙은 "자기 동일성 없는 엔터티는 없다(No entity without self-identity)"라는 슬로건으로 간략히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는 방식은 형이상학이 자주 비판받는 허세 섞인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동일률이 단순히 논리적 진리로서 머무르지 않고 형이상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님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 진리와 형이상학적 원리의 구분

칸트는 형이상학의 전통이 단순히 논리적 진리를 사용하여 실질적인 결론을 도출하려는 오류, 즉 형이상학적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논리가 본질적으로 형식적 학문으로서 내용으로부터 추상화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논리는 인식적 역할에서 보조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 실질적인 확장을 제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을 비판하며, 논리적 분석에 의한 형이상학적 결론 도출을 비판한다.

 

칸트의 논리에 따르면, 단순한 논리적 진술은 분석 명제(analytic proposition)에 해당하며, 이는 개념의 내용을 단순히 해체하고 명확히 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연장성을 가진다(All bodies are extended)"라는 명제는 '물체(body)'라는 개념 속에 이미 함축된 내용을 명시적으로 드러낼 뿐, 실질적인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일부 연장성을 가진 물체는 연장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부정을 통해 논리적으로 모순이 도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동일하게, "모든 바람은 자기 동일성을 가진다"는 명제도 '바람(wind)'이라는 개념에 내포된 내용을 단순히 드러내는 역할을 하며, 이 명제 자체가 실질적인 형이상학적 내용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모든 백조는 희다(All swans are white)"와 같은 종합 명제(synthetic proposition)는 독립적인 두 개념, 즉 '백조(swan)'와 '희다(white)'를 결합한다. 이러한 명제는 경험적 탐구를 통해 확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으며, "일부 백조는 희지 않다"는 진술이 모순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분석 명제와 구별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실질적인 확장을 원한다면 분석 명제보다는 종합 명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진다.

 

동일률과 형이상학적 논쟁

아리스토텔레스의 무모순율(Principle of Non-contradiction)는 존재론적 논의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한 속성도 어떤 대상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는 원리를 통해 존재 자체의 본질적 특징을 규명하려 했다. 이 원리는 형식 논리의 차원에서 "모순된 명제는 진리일 수 없다"는 진술로 표현될 수 있지만, 존재론적 차원에서도 적용 가능하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러나 칸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모순율은 분석 명제로서 형이상학적 논의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하며, 형이상학의 핵심 원리가 될 수 없다.

 

저자는 칸트의 관점에 동의한다. 만약 형이상학의 보조 원리가 분석적일 수 있다면, 주요 원리는 종합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동일률이 단순히 논리적 참인 분석적 참임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의 기본 원칙으로 삼고자 한다. 하지만 분석 명제인 동일률을 형이상학적 탐구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시도는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즉,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칸트적 전통이 충돌하기 때문에, 왜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지 정당화를 해야 한다.

 

저자는 형이상학의 기본 원리가 되려면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원리라면, 형이상학은 너무 단순하고 지루한 학문이 되고 말 것이다. 형이상학이 단순히 무의미하거나 자명한 진리를 다루는 학문으로 축소된다면, 형이상학을 비판해 온 철학자들(흄, 칸트, 비트겐슈타인)의 정신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형이상학자는 이러한 철학자들의 비판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들의 비판이 어떤 점에서 유효했는지 고려해야 한다.

 

즉, 형이상학이 실질적인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논리적 분석을 반복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동일률이 단순히 논리적 진리로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진리로서 실질적 의미를 가지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질적인 논쟁의 여지를 제공하며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동일률은 형이상학적 진리로서 단순히 분석 명제를 넘어서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이를 통해 논리와 형이상학의 경계를 재구성하고 형이상학적 탐구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

 

동일률에 대한 논의와 거짓말쟁이 역설의 철학적 함의 

그러나 동일률(Principle of Identity)에 대해 심각한 논란이 존재할 여지가 있는가? 어떠한 존재가 자기 자신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가? 단순히 이러한 질문을 제기한다면, 그 답은 분명 ‘아니오’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난점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가 "모든 것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라고 말할 때, 이는 단순히 의미를 상실한 채 배열된 단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입장은 현대 철학자들에게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대체로 무시된다. 보다 설득력 있는 접근을 위해, 동일률의 난점을 언어와 사고가 필연적으로 특정 담론의 범위(universe of discourse)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언어와 사고가 우주의 전체성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거짓말쟁이 역설(Liar Paradox)은 이와 같은 제한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논리적 난제 중 하나로, 이 역설이 단순히 언어적 퍼즐이 아니라 논리적 모순(logical paradox)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프랭크 램지(Frank Ramsey)가 주장한 바와 같이 단순한 의미론적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흔히 크레타인의 발언으로 기억되지만,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보다 정확하게 구성된다. 자정 몇 초 전에 "크레타인이 자정에 하는 모든 발화는 참된 명제를 표현하는 데 성공한 발화가 아니다"고 진술하고, 자정에 "참된 명제를 표현하는 데 성공한 발화는 크레타인이 자정에 한 발화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진술한다. 이 논증은 "어떤 F도 G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G도 F가 아니다."라는 논리 형식을 가지며, 형식적으로 타당한(valid) 논증으로 간주된다.

 

첫 번째 진술이 참이라면 두 번째 진술도 참이어야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진술이 자정에 크레타인이 한 발화라면, 이는 참일 수 없다(참이라면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번째 진술도 참일 수 없다. 만약 두 번째 진술이 자정에 크레타인이 한 유일한 발화라면, 첫 번째 진술은 참이 되고, 단일한 참된 전제를 가진 형식적으로 타당한 논증이 참이 아닌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역설을 해소하려는 일반적인 대응은 두 번째 진술이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 구조를 가지며, 따라서 어떤 참된 명제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논증의 본질적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논증은 단일 참된 전제를 가진 형식적으로 타당한 논증이 참이 아닌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논리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타르스키주의의 거짓말쟁이 역설에 대한 대응은 이전보다 더 저항하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난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타르스키주의자들은 “당신이 말하는 ‘진리’란 진리₀, 진리₁, 진리₂ 중 어느 것인가요?”라고 되묻는다. 이는 거짓말쟁이 역설이 "진리"라는 개념 자체에서 심각한 모순이 있음을 드러냈다고 보는 입장이다.

 

먼저, 가장 낮은 수준(대상 수준 0)에서는 “말(horses)은 날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이 참 또는 거짓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 수준에서는 "참"이나 "거짓"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대상 수준 문장에도 포함될 수 없다. 다음으로, 수준 1에서는 “‘말은 날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을 다룬다. 이 문장은 메타언어적 성격을 가지며 참 또는 거짓으로 판단된다. 수준 2로 넘어가면 문장은 메타-메타언어적 성격을 가지며, 예를 들어, “내가 수준 1 문장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문장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이 참 또는 거짓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참”이라는 단어가 각 수준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체계적으로 애매성을 가지는 단어 "참"은 각 수준에서 다른 속성을 표현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모든 참된 문장은 참이다”라고 말할 때, 이 문장이 정확히 어느 수준에서 참인지 고정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 문장이 수준 36에 해당한다고 가정하면, 그 문장은 “수준 36 이하의 모든 참된 문장은 참이다. 단, 이 문장은 예외일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조차 지나치게 낙관적이며, 수준 36 이상의 문장은 이 발언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이 문장을 완전히 다루지 못한다.

 

타르스키적 접근은 논리학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논리적 표현 “p ∨ q”와 같은 표현에 의미론을 부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진리표를 사용할 수 있다. 이 표에 따르면, “p ∨ q”는 p 또는 q 중 하나가 참일 때 참이고, 둘 다 거짓이면 거짓임을 규정한다.

 

p q p∨q

T T T

T F T

F T T

F F F

 

문제는 타르스키주의자들에게 "진리"라는 개념이 더 이상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 “p ∨ q”가 참이라는 조건을 설명하려 해도, 이는 “진리₀”, “진리₁”, “진리₂” 등 각 수준마다 달라지는 체계적 애매성을 가진다는 한계를 가진다.

 

타르스키적 접근은 동일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제 동일률(“모든 것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로 돌아오자. 문장 “(x) x = x”의 진리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는 동일률에 대해서도 “진리₀ 조건”, “진리₁ 조건”, “진리₂ 조건” 등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상 수준, 즉 인간의 개입 없이 자연(nature sans mind)을 다루는 수준에서는 동일률이 참이다. 하지만 모든 수준을 아우르는 일반적인 진술은 불가능하며, 원칙적으로 모순으로 간주된다. 논리 또한 논리₀, 논리₁, 논리₂ 등 각 수준별로 분리되며, 동일률도 각 수준마다 다른 대리 표현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동일률은 더 이상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으로 여겨질 수 없으며, 각 수준에서 아래 수준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자기 동일적임을 주장한다고 봐야 합니다.

 

결국 동일률이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형이상학의 근본적 진리를 표현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원리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려면 타르스키적 접근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형이상학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거짓말쟁이 패러독스를 반타르스키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존재 자체가 특정 수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을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거짓말쟁이 역설은 (많은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한 언어적 병리 현상이 아니라, 의미론, 논리학, 형이상학에 걸쳐 발생하는 근본적 문제이다. 특히 형이상학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편양화사 “모든 것(everything)”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타르스키 학파의 접근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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